중국역사상 가장 낭만적이고 비련의 주인공인 양귀비(杨贵妃,719 - 756)의 묘(墓)는 시안에서 서쪽으로 약 60 Km 이고, 싱핑(兴平)시 에서 12.5 Km 떨어진
마웨이포(马嵬坡) 에 있다. 묘원은 크지않은 고대 건축 양식의 건물 몇채, 조상(雕像), 비석등이 있다. 묘는 외형이 반구형(半球型)이고 청벽돌로 되어 있고
높이 3 m , 밑지름 5 m 정도이다. 총면적은 3,000평방미터이다.
马嵬镇
양귀비묘 위치
양귀비묘(杨贵妃墓) 입구
시안에서 바로 오면 쉬울 양귀비묘!
오장원 관광과 묶었더니 거의 1박 2일 개그맨들이 무색할 미션급 수준이였다
아무튼지 어렵게 왔으니 마치 그공을 알아주는듯 입장 우대 혜택을 주었다!
계단 좌측 표석을 확인하고 계단을 올라서 양귀비묘역을 간다.
길 맞은 편에는 문닫을 시간이라 텅빈 주차장 ..귀비 슈퍼점도 문이 닫혔고
묘의 정문이고 왼편에 매표구가 있다. 개장시간은 08:00 - 18:00, 입장료는 40 元/人 이다.
양귀비는 본명은 양옥환(杨玉环)이며 초선(貂蝉 ), 왕소군( 王昭君), 서시( 西施)와 함께 중국 4 대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양현염(杨玄琰)의 사호(司户)벼슬 임지인 스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서 태어났다.( 산시성 잉위에(永乐)출생설등이 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양립(杨立)의 집에서 양녀 처럼 자랐다. 가무와 음률에 뛰어나고 천하절색이었다. 17세에 당의 6대 황제인 현종(玄宗)의 18왕자 수왕( 寿王) 이모(李瑁 )의 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玄宗,685 - 762, 재위 712 - 756)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뜻에 맞는 여자가 없던 차에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서 황제가 온천궁(温泉宫)에서 황제 자신이 작곡한 예상우의무(霓尚羽衣舞)에 맞추어 춤추는 그녀를 보고 바로 총애하게 되었다. 그후 수왕과 헤어지고 화산에서 태진(太真)이란 여도사가 되어 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황제와 결합되어 745년 27 세에 정식으로 귀비로 책립되었다. 한편 수왕은 위씨(韋氏)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양귀비는 황제의 마음을 사로 잡은후 공석인 황후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하였다. 귀비로 책정된후 죽은 부친은 대위제국공(大尉齐国公 )에 추서되고 숙부는 광록경( 光禄卿)에 임명되었다. 큰오빠는 홍로경( 鸿로卿), 작은 오빠 시어사( 侍卸史), 남동생 사공(司公 ), 큰언니 옥패(玉佩 )는 한국부인 (韩国夫人), 셋째언니 옥정( 玉筝)은 괵국부인(虢国夫人 ), 여덟째 언니 옥차 (玉钗)는 진국부인( 秦国夫人)으로 봉해졌고 6촌 오빠인 양국충(杨国忠)은 나중에 재상의 지위까지 오른다.이들의 위세는 공주나 부마 보다 위에 있었다.
후궁에는 아름다운 미인이 3 천이나 되었지만 ( 后宫佳丽叁千人)
3 천궁녀가 받을 총애 한몸에만 받았다네 (叁千宠爱在一身)
황금의 궁전에서 화장 마치고 기다리는 밤 (金屋粧成娇侍夜)
백옥의 누각에서 잔치 끝나면 취해 화합하는 봄 (玉楼宴罢醉和春)
자매형제는 모두 제후의 서열로 봉토를 받고 (姉妹兄弟皆列土)
부럽구나! 찬란한 광채가 가문에 비치는구나 (可怜光彩生门户)
드디어 세상의 부모들 마음은 (遂令天下父母心)
아들낳기 보다는 딸낳기를 더 소망했다네 (不重生男重生女)
(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长恨歌) 중에서)
양귀비묘(杨贵妃之墓)
중국 4대 미인중 한사람인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수화 지미(羞花之美)라고 비유한다. 사연인즉 현종을 만나기전 어느날, 양귀비가 꽃구경을 하다가 "꽃아,꽃아,너는 해마다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그 언제 빛을 보겠느냐? "라고 한탄과 눈물을 흘리며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꽃밭침이 오그라 들고
꽃잎이 움츠러 들었다. 그 꽃은 함수초(含羞草)였다. 이 광경을 본 한 궁녀가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이 났고, 양귀비의 아름다움은 수화(羞花)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사(正史)인 《旧唐书.杨贵妃传》에서 그녀를 "절세의 풍만한 여인(资质丰艳)"이고 "가무에 뛰어나며 총명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백(李白)은 양귀비를 " 활짝 핀 모란", 백거이(白居易)는 영원한 비극 애정곡인 《장한가(长恨歌)》를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현지 중국인 가이드의 말로는 양귀비는 "키 158cm , 체중 58 kg의 통통한 미인"으로 호사가들이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문득 이조 선조때 백호(白湖) 임제(林梯, 1549 - 1587)의 시조가 떠올랐다.
청초(青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红颜)은 어듸두고 백골(白骨)만 무첫나니
잔(盞)잡아 권(劝)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시조는 임제가 평안도 평사(评事)로 부임도중 개성을 들려 황진이(黄真伊, 1506? _ 1567?)를 만나보고자 했으나, 이미 3개월 전에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황진이묘에 들러 술잔을 부어면서 인생무상(人生无常)을 한탄하며 부른 노래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으로 전해온다.
천하 절색 양귀비의 무덤을 보니 더욱 애잔함을 느낀다.
양귀비분(杨贵妃粉) 요약 해설
명대에 묘에는 봉분이 있었고 고목나무가 두러 서있었다. 송.원대에서는 주변 100보이내는 농사나 채굴을 금지했고 그후 전란등으로 묘가 쇄잔하여
백토(白土)로 덮었다. 현재 청벽돌 무덤이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마웨이포 근처에 피부가 검고 아주 못 생겨서 시집을 못가는 한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양귀비의 무덤에 쓰러져 대성통곡하였다. 그러던중 아가씨의 얼굴에 무덤의 흙이 묻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갑자기 성형수술 을 한것 처럼 예쁜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양귀비 무덤의 흙을 귀비분(贵妃粉)이라 하여 모두 퍼가기 시작하여 봉이 없어지게 되었다. 청의 건륭제때 벽돌을 쌓아 이를 방지하고 현재 규모로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마외병변(马嵬兵变) 요약 해설
영주(営州)유역(柳域), 이란계 호인(胡人)인 안록산(安禄山)은 양귀비의 지원등으로 3도 절도사를 겸하여 막강한 군부세력으로 등장한다. 755 년11월 판양(范阳)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한다. 이것이 안사의 난(安史之乱)이다. 장안의 동편 가장 가까운 요새인 통구안(潼关) 이 함락되자 현종은 756년 7월 승상 위견소(韋见素), 양귀비, 양국충 고력사(高力士)등과 함께 스촨(四川)으로 도피하던중 장안의 서쪽지방인 마웨이포(马嵬坡)에 이른다. 현종은 처음에 개원성세(开元盛世)를 이루었지만 두 간신 이임보(李林甫),양국충(杨国忠)의 전횡과 양귀비와의 환락에 빠져 성군의 모습을 볼수 없고 천보대란(天宝大乱) 즉 안사의난을 맞이 하게 된 것이다. 마웨이포에 도착한후 호위부대인 금군(禁军) 6군(六军)의 대장군 진현례(陈玄礼)등이 7월 15일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 , 한국부인등을 처형하고 급기야는 양귀비의 죽음을 요구한다. 진현례는 양귀비 죽임을 강력하게 요구 하여 현종은 고력사를 시켜 양귀비를 죽게한다. 양귀비는 마외불사(马嵬佛寺)에있는 배나무에 목을 메고 자결한다. 나이 38 세이다. 시신은 정원으로 가져와서 진형례가 확인했다. 이것이 마외병변(马嵬兵变)이다. 이사건의 배후에는 태자 이형(李亨)이 적극 개입했다. 그는 동년 8월 당의 7대 황제 숙종(肃宗)이된다. 진현례는 사건 이후 현종에게 충성을 다하고 사천성으로 피신하고 태상황(太上皇)이 된 현종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와 흥경궁(兴庆宫)에 기거 하게된다. 당 휘종(僖宗)때인 880년 정전 (郑畋)이 쓴 《마외파(马嵬坡)》를 통해 알수있다. 일설은 진현례가 양귀비의 미모를 애석히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고력사와 모의하여 시녀로 바꿔치고 고력사(高力士)는 수레로 귀비 시체처럼 운반하여 진현례가 확인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양귀비는 진현례의 도움으로 남쪽으로 도주 하여 상해 부근에서 일본 상인의 배로 일본 야마구치현(山口县)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일본 무사 야마구치 지로(山口次郎)와 부부의연을 맺고 30년간 살다가 68세에 죽었다는 설이있다.지금 후손들이 살고있다고 하고 양귀비묘도 있다. 또 다른 설은 양귀비는 자살하지 않고 반란군속에서 피살 되었고 시체를 거두지 못했다는 설, 그리고 고력사와 진현례는 자살로 죽은 양귀비 시체를 이불에 싸서 풀속에 방치했다는 설, 그후 현종이 난이 평정된 후 후히 장사를 지내 주려고 했으나 시체를 찾지 못하고 옷가지 장식품등으로 지금 묘인 의관총(衣冠塚)을 만들었다는 설등이다.
어양(渔阳)에서 일어난 북소리 천지를 뒤흔들어 (渔阳鼙鼓动地来)
크게 놀라 연주하던 예상우의곡 소리가 끊기었네 (惊破霓裳羽衣曲)
구중궁궐에 불길이 솟아 오르고 (九重城阙烟尘生)
일천 수레와 일만 기병은 서남으로 향했네 (千乘万骑西南行)
비취깃발 휘날리며 가다가 멎고 (翠华摇摇行复止)
장안 서쪽으로 도정문 나서기를 백리 남짓 (西出都门百余里)
육군이 꿈쩍 않으니 어찌할수 없구나 (六军不发无奈何)
어여쁜 여인은 말 앞에서 죽어 갔네 (宛转蛾眉马前死)
꽃비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 하나 없고 (花钿委地无人收)
비취깃털, 공작비녀, 옥비녀도 버려졌네 (翠翘金雀玉搔头)
황제는 얼굴 가린채 구해 주지 못하고 (君主俺面救不得)
돌아보는 그 얼굴에는 피 눈물만 흘렸네 (回看血泪相和流)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长恨歌) 중에서)
여하튼 757 년 태상왕이된 현종은 실권도 없고 세인의 눈총을 의식하여 비밀리에 마웨이포(马嵬坡)에 양귀비를 묻은후 초라한 묘와 사당을 짓고 자신은 6년후인 762 년 77 세에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저녁 궁전에 날아드는 반딧불에 귀비 생각 더 해지고 (夕展萤飞思惟然)
외로운 등잔, 돋은 심지 다타버려도 잠못 이루네 (孤灯挑尽未成眠)
서서히 울리는 종소리에 밤은 더욱 길어져 (迟迟钟鼓初长夜)
반짝이는 은하수 하늘가 동이 트려 하는구나 (耿耿星河欲曙天)
싸늘한 원앙 기와 서리꽃 피어나니 (鸳鸯瓦冷霜华重)
차가운 비취이불 누구와 같이 할까 (翡翠衾寒谁与共)
아득한 생사 이별 해를 다시 넘기는데 (悠悠生死别经年)
혼백은 아직 꿈에서 조차 찾아오지 아니하네 (魂魄不曾来入梦)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长恨歌) 중에서)
모택동(毛泽东)의 친필 장한가(长恨歌)
양귀비(杨贵妃)를 천년의 스타로 만든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长恨歌) 전문(全文)
양귀비 묘에는 역대 문인 묵객 의 방문이 그칠줄 몰라서 진귀한 시 비석이 38종에 이른다 그중에서 당 휘종이 쓴 《행촉경마외(幸蜀经马嵬>>, 당의
이상은(李商隐), 가도(贾岛), 청의 임칙서(林则徐)등의 글이 유명하다.
태진각( 太真阁) 입구
계단을 오르면 서있는 양귀비의 백옥 조상 , 밭침대 높이 2m, 조상 높이 3.8 m
2층 전각인 태진각(太真阁)
태진각(太真阁)에서 본 뒷면
화산(华山)에서 태진(太真)이라는 여도사가 될 때의 모습을 그린 귀비 입도도(贵妃入道图)
당대 부녀 생활전
당대 소량의 조각품, 상장례문물등이 진열 되어 있다.
봉건 사회의 성세인 당나라 시대에서 여성인 무측천, 양귀비가 발휘한 재기, 지혜, 역량과 봉헌을 평가하고 있다.
중국 공식 양귀비(杨贵妃) 초상
양귀비(杨贵妃) 관련 그림 모음
왼편 회랑에 있는 양귀비(杨贵妃) 부조
백거이(白居易, 772 - 846)는 당의 대시인이다. 자(字)는 낙천( 乐天), 혹은 취음선생(醉吟先生 ), 향산거사( 香山居士)등으로 불리운다. 뤄양( 洛阳) 부근 신정 (新郑) 태생이다. 29세에 진사과( 進士科), 32세에 황제 친시(亲试 )에 합격했고 항조우( 坑州) 쑤조우(苏州 ) 자사(刺使 )를 거쳐 나중에 형부상서(刑部尚书)까지 올랐다. 그는 시로서 사회를 풍자하고 도의를 세우려했다. 양귀비가 죽은지 50년후인 807 년, 그가 35세 때 친구와 함께 마외포 부근 선유사(仙游寺)에
놀러 갔다가 현종과 양귀비의 고사와 관련하여 지은 담화시(谈话诗)가 바로 장한가(长恨歌)이다. 7언(言) 의 고풍시(古风诗)로 120구(句) 장편서사시 이고 두사람 사랑의 스토리를 3부작으로 썼다. 전체 시중에서 마지막 구절이 애정비극에 대한 세인들의 깊은 동정을 사고 있다. 천장지구유시진(天长地记久有时尽)에서 "장(长)"을, 차한면면무절기(此恨绵绵无绝期)에서 "한(恨)"을 따서 장한가(长恨歌)로 제목을 붙인 것이다.. 즉 "다함이 없는 사랑의 한 노래"라고 할수 있다.
칠월칠석 궁궐 장생전에서 (七月七日长生殿)
밤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夜半无人私语时)
하늘에 있으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天愿作比翼鸟)
땅에서 머문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랐다오 (在地愿为连理枝)
하늘과 땅은 비록 장구하나 끝과 다함이 있겠지만 (天长地久有时尽)
우리의 이 한만은 영원히 면면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此恨绵绵无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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