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원(五丈原,우장위엔 )은 촉한 승상(蜀汉丞相)인 제갈량(诸葛亮, 181-234) )이 당시 장안(长安 )을 목표로 7년간 5차례(6차례로 보기도 한다) 북벌 출병을 했지만 위하(渭河, 웨이허 )를 건너 동진 하지 못하고 234년 10월8일(음력 8월28일) 마지막으로 "아득하고 아득한 하늘이여!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悠悠苍天 此何人哉)" 라는 말을 남기고 통한의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
어린 시절 부터 삼국지를 읽을때마다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다. 막상 간다고 하니, 마치 제갈 공명( 诸葛孔明)의 임종을 지켜보러 가는듯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오늘은 날씨도 흐리고 비가 온다고 한다. 제갈량의 안타까운 마지막 그날을 기억이나 하듯이!
숙소인 롱하이호텔을 나와서 시안 기차역(西安火车站)으로 걸어 가다가 역전 인근 만두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미리 예매해둔 07:03 시안 출발 08:49 차이지아포 ( 蔡家坡)행 기차를 탔다. 오장원제갈량묘(五丈原诸葛亮庙)까지는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차이지아포 는 아주 작은 시골 도시이나, 시안에서는 기차가 자주 다니는 경유지이고 기차가 버스 보다 오히려 싸고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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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에서 차장에게 오장원(五丈原,우장위엔)에 간다고 말하였더니 반가와 하면서 차이지아포 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었다. 거의 두시간 걸려서 도착했다
차이지아포 기차역(蔡家坡 火车站)
기차시간표
차이지아포 역에서 오장원으로 가는 방법은, 역광장 앞에서 시내버스 (2路)를 타면 종점인 가까운 시외버스 터미날(蔡家坡汽车客运站)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지포춴(鸡坡村) 행 미니버스를 타면 오장원 제갈량묘(诸葛亮庙) 까지는 약 30 분 거리다. 우리는 비가 올 것 같고 오장원 관람후 양귀비묘(杨贵妃墓)도 보고 시안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여유가 없기에 택시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차이지아포 역앞에서 제갈량묘까지 왕복과 대기시간을 포함하여 70 元에 결정하였다. 싼 편이다. 시내를 벗어나서 위하를 건넌다. 위하는 관중지방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강으로서 황하의 최대 지류이다. 강태공(姜太公, 尚末周初) 이 낛시질하던 조어대(钓鱼台, 디아오위타이) 도 인근 서쪽의 위하(渭河) 강변이다.
오장원(五丈原) 주변지도
하늘에서 본 오장원(五丈原)
오장원(五丈原) 옆지형
오장원(五丈原)은 진령산맥(秦岭山脉) 끝자락에 있어서 뒤는 태백산(太白山),앞인 북쪽은 위하(渭河)가 동서로 흐르고 동쪽은 사수(斜水), 지금 이름은 석두하(石头河), 서쪽은 맥리하(麦李河)가 흐르는 천연요새다.. 오장원(五丈原)은 높이 약 150m, 남북 약 3.5km, 동서 1.5 km 로 북쪽이 넓고 남쪽이 비좁은 비파(瑟琶) 모양의 묘하게 솟은 구릉지이고 비파(瑟琶) 목부분의 폭이 5장(五丈,15m)이라 오장원(五丈原)이라 부른다..
제갈량(诸葛亮)은 234년 제 5차 북벌에서 최대규모인 10만 대군을 이끌고 ,위연(魏延,? - 234) 을 선봉으로 삼고 한중(汉中)을 출발하여 포사도 (褒斜道,바오씨에다오)를 지나서 위연을 오장원 아래 위하 남안(南岸, 난안)에 주둔시키고 본진은 오장원 위에 둔다.무공(武功,우공)으로 동진하여 장안(长安,창안)으로 진출하는것이 목표였다.사마의(司马懿, 179 - 251)가 이끄는 위군(魏军)은 위하북안 (渭河北岸)과 사수 동안(斜水东岸)에 주둔하여 대치하게된다. 한편 제갈량에게 혼이 난적이 있는 사마의는 무공 지역을 막으며 수비에만 치중 하는 지구전을 편다. 촉군이 유리한 듯 했으나 100여일 대치중에 제갈량은 병이 든다. 제갈량은 후주 유선 (后主刘禅)에게 마지막 표를 올린고 강유 (江维,202 - 264), 마대(马岱,?-?), 양의(杨仪, 189 - 235)를 불러 유언하고 철군을 완료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칠 것을 당부한다. "가을 바람 부는 오장원(秋风五丈原)"에서 우국충정의 일생을 마감한다. 27세때 초려(草庐)에서 나와 꼭 27년이 되는 54세 때이다. 제갈량의 북벌 자체가 촉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방비를 튼튼히 한후 중원을 공략하는 장기 국가 전략이었다. 명말청초의 학자 왕부지(王夫之, 1619 - 1692)가 밝혔듯이 "공격으로 수비하는 작전(以功为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갈량의 죽음은 촉한의 대들보가 무너진 것이었다. 후임인 장완(蒋琬, ? - 246), 비위(费祎, ? - 253)도 수명이 길지 못했고 강유(姜维)의 무리한 북벌계승, 조정의 내부분열등으로 30년후 망하게 된다. 삼국연의(三国演义)도 제갈량의 죽음후에는 곧 종결로 흐른다.
택시가 제갈량묘 (诸葛亮庙, 시신이 없는 곳이니 우리말로는" 사당(祠堂)"이 더 정확한 표현) 옆 주차장에 도착했다. 미니버스를 탈 경우에도 우장위엔역(五丈原站)에서 내리지 말고 주거량먀오역(诸葛亮庙站)에서 내리도록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이 걷는다. 제갈량묘는 오장원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위하(渭河)와 당시 위(魏)나라 땅이 보이는 곳이다.
제갈량묘(诸葛亮庙) 광장이 나온다. 광장앞에 " 오장원(五丈原)"이라고 쓴 큰 석비가 서 있다. 그 아래로 그의 사망나이인 54 계단이 있다.
광장 동쪽 한편에 "心外无刀(심외무도)"라고 새겨놓은 큰 석비. 칼 즉 힘으로 누르지않고 마음을 얻어 승복을 얻는다는 "诸葛亮用兵之道(제갈량용병지도)"를 의미하고 있다. 잠시 생각에 잠기게한다.
제갈량묘(诸葛亮庙) 정문인 산문(山门)
입장표
입장료는 35元/人이다. 문안에 들어 서면 크고 작은 여러 사당 건물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다. 제갈량묘(诸葛亮庙)는 당초 삼국말년(三国末年)에 지어졌고 원,명, 청대를 거치면서 9차례 중건 되었다고 한다. 현재 기본적으로 청말(清末) 건축 풍격을 갖고 있다.
산문 왼쪽 기둥에 "一诗二表三分鼎" ( 일시이표삼분정, 一诗:刘备에게 읊은 <梁父吟>, 二表:前后<出师表>, 三分鼎:天下三分을 의미)라고 쓰여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万古千秋五丈原"(만고천추오장원, 수천만년 영원히 숭상하는 오장원)이라고 쓰여 있다. 제갈량묘는 북향이다. 산문 입구안에는 남송(南宋)의 악비(岳飞, 1103 - 1142)가 쓴 출사표가 벽면 돌에 새겨져 있다.
출사표 탁본작업
산문(山门) 안 좌측의 평북장군 마대(马岱) 소상
산문안 우측의 한중태수 위연 (魏延) 소상
"五丈秋风"(오장추풍, 오장원에 부는 가을 바람)이라고 현판이 붙은 헌전(献殿)이다. 안에는 삼국시기(三国时期)의 고사(故事)에 대한 벽화등이있다.
정중앙에 제갈공명(诸葛孔明)의 좌상을 모신 정전(正殿)이다. 입구 현판 "英名千古 (영명천고, 영웅 제갈공명의 명성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좌측에 서있는 편장군 왕평(王平, ?-248)과 관우(关羽)의 차남 관흥(关兴, ?-234) 소상
우측에 서 있는 장비(张飞)의 장남 장포(张苞, ?-239) 와 거기장군 요화(廖花,?-264) 소상
제갈공명(诸葛孔明)의 소상
" 将相师表"(장상사표, 모든 장수와 재상들의 모범이 되는 스승). 제갈공명은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다. 탁월한 정치가이자 군사지략가임은 물론, 아들 제갈첨(诸葛瞻, 227-263)까지 청렴결백 보국 충정하였고 손자 제갈상(诸葛商, 244-263) 도 함께 전사하는 등 3대 모두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出将入相"(출장입상, 전장에 나가서는 뛰어난 장수가 되고 입조하면 훌륭한 재상이 된다). 즉 인덕과 재주를 겸비하여 문무 요직을 맡는다 는 말
"北定中原" (북정중원, 전군을 통솔하고 북벌하여 중원을 평정).(출사표에서)
묘(庙) 동측의 대장군 강유 (姜维) 소상
묘(庙)서측의 중군사 양의 (杨仪) 소상
제갈
상서령 비위(费祎, ?-253) 소상
진남장군 마충(马忠, ?-249) 소상
팔괘정(八卦亭)
팔괘정(八卦亭)은 제갈공명이 개발한 팔진도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제갈공명(诸葛孔明) 진열관
제갈공명(诸葛孔明) 입상
제갈량(诸葛亮, 字 孔明) | 사마의(司马懿, 字 仲达) |
제갈공명(诸葛孔明)의 5차 북벌에 대한 지도와 상세한 설명이 있다. 조명관계로 현장 사진이 매우 흐리게 나왔기에 별도 약도를 올려 본다
북벌 지형도(北伐地形图)
5차례 북벌 노선(北伐路线)
육출기산(六出祁山, 기산에 6번 출정) 이라고 하나 제갈공명이 실제 기산에 간 것은 1차와 5차 뿐이다
목우(木牛)
유마(流马)
의관총(衣冠冢)
제갈량 의관총은 정전옆 송백림속에 있다. 삼국말기에 만들어 진것으로 전해온다. 234년 10.8 (음력 8.28), 제갈공명이 오장원 군영에서 운명할때 유언에 따라 시신은 한중(汉中,)으로 옮긴후, 후주 유선(后主 刘禅)의 주도하에 면현(勉县미엔씨엔)소재 정군산(定军山,딩쥔산)에서 장사를 지냈다. 그곳에 묘(墓)가 있다. 이곳은 옷, 모자, 장신구등 을 묻어 사당인 묘(庙)를 만들어 기리고 있는 것이다 제갈공명은 진수(陈寿, 223 - 297)의 《삼국지三国志》〈제갈량전)에서 " 신장이 8척 (현재 기준 약 180 cm)이며 문약한 선비가 아니라 위엄과 힘을 갖춘 산동성 대장부"로 묘사되고있고 나관중(罗贯中, ?1330-?1400)은 《삼국연의》에서 "공명은 얼굴이 관옥(冠玉) 같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미간이 수려하며, 품고 있는 천지지지(天地之机), 표연한 모습은 마치 신선같다" 고 하였다.
낙성석 누각(落星石楼阁)
낙성석(落星石)
낙성원(落星院)을 들어서면 누각과 누각안에 낙성석 (落星石)이 있다. 동진(东晋) 시대의 <진양록 晋阳秋>에 "제갈공명이 귀천하는 날 거대한 붉은 별이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빛을 발하며 떨어졌다." (诸葛孔明去世当天, 有颗巨大的赤色星, 由东北向西南方向闪逝而落......)기록하고 있다. 진수(阵寿, 223 - 297)의 《삼국지 三国志》<제갈량전诸葛亮传>의 주석에서도 "붉고 억새풀잎 같은 별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공명의 군영에 3번 떨어 졌다가 2번 되돌아갔고 , 떨어 질때는 컸으나 되돌아 갈때는 작았다" (有星赤而芒角, 自东北西南流, 投于亮营, 三投再还, 往大还小) 라고 기록하고 있다. 돌의 모양이 특이하고 오장원(五丈原)에 유성이 떨어져 생긴것이라는 웅덩이도 있는것으로 봐서 유성고사(流星故事)를 애통한 제갈공명의 죽음과 연계시키고 싶은 심정이다.
월영전(月英殿)
정전(正殿) 뒷편에는 제갈공명의 부인인 황월영(黄月英, 생졸미상)을 모신 곳이다. 부인은 당시 형주(荆州)의 명문인 황승언(黄承彦) 의 딸이다. 딸이 재주 있다고 제갈량에게 추천, 청혼을 하여 혼인하게 된것이다. 기록 에는 "키가 매우 크고 황색 머리에 검은 피부를 가졌고 아명이 아추(阿丑)이고 재주와 지식이 넓다"고 한다. 알려진 바로는 당시 이모가 형주 지배자, 유표 (刘表,142 - 208)의 후처 채부인(蔡夫人)이고, 처숙부는 실권자 채모(蔡瑁)였다. 대단한 세도 명문가이다. 한편, 공명의 부인은 천문지리에 통달하고 병법에 능통하였으며, 공작기술이 탁월하였다고 한다. 목우 ,유마 등이 부인의 아이디어 였다고 하니 내조의 공이 매우컸다고 본다. 이만하면 조실 부모하고 삼촌 따라 와서 형주에서 타향살이 하던 공명은 분명 땡(?)잡았다고 할 수있다.일설로는 그녀가 미인이며 재주가 많으니까 고향 처녀들의 질투심 때문에 추녀로 소문을 냈다고도 한다. 중국에서 부부가 함께 모셔진 사당으로는 오장원(五丈原)의 제갈공명(诸葛孔明) 부부가 유일하다고 한다.
황월영(黄月英) 소상
팔괘진관(八卦阵馆)
옆으로 가면 팔괘진의 미로를 만든 건물이 있다. 들어가보니 작은 규모이지만 흥미로왔다. 제갈공명(诸葛孔明)이 죽고 촉군이 철수한후 위군 총수 사마의(司马懿)가 오장원촉군 진영구조를 둘러보고 "제갈량은 진정 천하기재다"(诸葛亮真天下奇才也)라고 탄성을 질렀다고 하며, 이때부터 제갈공명(诸葛亮)의 독창적인 팔진도(八阵图)도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팔괘진 미로를 직접 들어 가보니 좀 긴장이 되고 묘한 신비감마저 들었다.
(
비림(碑林)
벽화(壁画), 서화(书画)
광장(广场) 아래 계단길
제갈량묘(诸葛亮庙)는 그 규모가 큰편은 아니지만 삼국말기(三国末期) 마지막 통한을 남기고 떠나는 제갈곰명(诸葛孔明)의 비통한 정경을 회상하게 한다.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다 바친다"(鞠躬尽瘁, 死后而已)는 그의 일생은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산문(山门)을 나오니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마치 하늘도 제갈공명(诸葛孔明)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하다. 부슬비가 멎고 마음이 심란하기도 하여 계단아래로 내려갔다.
옛 제갈전(诸葛田)에 심은 옥수수
오장원(五丈原) 언덕위에 있는 넓은 밭, 제갈전(诸葛田)의 일부이다. 제갈량(诸葛亮)이 둔병하면서 농사를 지어 군량을 보충한 곳이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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