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고리(西施故里, 시스구리)는 샤오싱(绍兴) 서남쪽으로 약 56km 떨어진 제기(诸暨, 주지)에 있다. 오전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샤오싱 서부버스터미널(绍兴汽车西站)으로 갔다. 9시경 버스를 타고 약 50분 걸려 제기 버스터미널(诸暨汽车客运中心)에 도착한후 다시 택시를 타고 약 10여분만에 서시고리에 도착했다. 서시고리는 완사강(浣纱江, 후안샤장)을 끼고 양쪽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완사대교를 건너기전 동쪽 강변에는 서시고리 고객지원센터, 중국역대명원관(中国历代名媛馆), 정씨종사(郑氏宗祠, 범려사(范蠡祠)등이 있고 강 건너 저라산(苎萝山, 주뤄산)기슭의 서쪽 강변쪽은 서시가 살던 곳으로 서시전(西施殿), 고월대(古越台)등 서시관련 유적이 있다. 먼저 고객지원센터쪽으로 들어가서 관람하기로 했다.
서시고리 북문
서시고리 고객서비스센터
건물 입구 큰벽에는 '제기(诸暨)는 명인을 배출한 지방이다. 미녀 서시(西施)와 화가 왕면(王冕)이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라고 쓰여져 있다. 모택동(毛泽东)의 글씨이다.
역대명원관은 중국역대 저명한 여성들을 주제로한 인문전시관이다. 고대부터 청말까지 약 100명 여성들의 모습을 밀랍 인형, 조각물 혹은 그림등 다양한 기법으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전체를 4대미녀, 궁정여성, 민간여성, 고사(故事)속의 여성등 4개부문으로 나누고 있다.
역대명원관 입구
내부 정원
중국 4대미인을 살펴본다. 춘추말기 서시(西施)는 강의 물고기가 빨래하는 서시의 미모에 홀려 지느러미 흔드는 것을 잊어서 물밑으로 가라앉는다고 하는 "침어미인(沈鱼美人)"으로 불린다
침어미인 서시
왕소군(王昭君)은 한무제(汉武帝) 때 흉노와 혼인 조건의 화친조약으로 흉노땅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말위에서 비파를 타는데 날아가는 기러기가 그녀의 미모에 혼이 빠져 날개짓 하는 것을 잊어서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미인(落雁美人)"이라 칭한다.
낙안미인 왕소군
초선(貂蝉)은 후한(后汉)말 여포(呂布)로 하여금 동탁(董卓)을 죽이게한 미인으로 그녀가 밤중에 달을 보고 있는데 달의 여신 항아(姮娥)가 자신의 미모가 초선에 미치지 못함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구름속으로 숨았다고 해서 "폐월미인(闭月美人)"으로 불린다.
폐월미인 초선
귀비 양옥환(杨玉环)은 당현종(唐玄宗)을 사로잡은 미인으로어느 날 화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꽃을 쓰다듬으니 꽃이 그녀의 미모에 부끄러움을 느껴 꽃잎이 움츠렸다고 하여 수화미인(羞花美人)으로 불린다.
수화미인 귀비 양옥환
궁정여인은 항우(顶羽)의 애첩 우희(虞姬), 유방(刘邦)의 처 여치(吕雉), 당의 측천무후(则天武后), 청의 서태후(西太后)등 20여명이다.
우희 | 여치 |
측천무후 | 서태후 |
민간여성은 당의 설도(薛涛), 송의 당완(唐婉), 청의 이청조(李清照)등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여성들이고, 고사속의 여성들은 창조의 어머니 여와(女娲), 달의 여인 항아(姮娥), 양산박과의 애절한 사랑을 나눈 축영대(祝英台)등 모두 75명 정도이다.
역대명원관을 나와서 조금 걸어가면 보행거리가 나오는데 월의 옛거리가 꾸며져 있어 옛건축물, 서시전설 조각벽, 식당등을 볼수있다.
서시고리 보행가
서시전설 조각벽
정단정(郑旦亭)은 8각 겹처마, 3층으로 된 정교한 모양의 정자인데 정단(郑旦)을 기념하는 정자다. 정단 역시 완사의 미녀로 서시와 같이 선발되어 오왕(吴王) 부차(夫差)에게 바쳐진 처녀로 1년만에 병사하였는데 향수병 탓이라고 하나 불분명하다.
정씨종사(郑氏宗祠)는 정단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종사앞에 2개의 아치형 다리가 놓여 있다.
정씨종사 정문
내부시설
희대(戏台)는 만년대(万年台)라고 하는데 민간 건축예술의 집합체라고 할만큼 화려하고 정교하다. 주로 고사 (故事)중심으로 연극 공연을 하며 이 지역 문화오락 활동의 중심무대라고 한다. 문화혁명 때 파손 되기도 했다.
희대
연지(莲池)
더 들어가서 왼쪽으로 가면 안쪽 끝에 범려사(范蠡祠)가 나온다.
범려사
범려(范蠡, BC536- BC448)는 춘추말기 초(楚)의 삼호(三户, 현재 하남성 남양(南阳)) 출신으로 문종(文种)과 함께 월왕(越王) 구천(勾践)을 20여년간 헌신적으로 보필하여 오(吴)를 멸망시킨후 대장군이 되었으나 구천의 곁을 떠남으로서 문종(文种)처럼 투사구팽(兔死狗烹)당하지 않았다. 그는 제(齐)의 정도(定陶, 현재 산동성 하택(菏泽))로 가서 이름도 저이자피(鸱夷子皮)로 바꾸고 도자기 사업으로 거부가 되어 자칭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칭하였고 후대에 재신(财神)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인은 "범려는 나라에 충성했고, 지혜로 몸을 지켰고, 상업으로 치부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사당안에는 범려의 청동입상이 서있고 "어월성신(於越圣臣, 월나라의 성스러운 신하)" 편액이 걸려있고 그 밑에는 대장군 (大将军)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뒷벽에는 《사기(史记)》중에서 범려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발췌하여 죽간 형태로 목판에 새겨 놓았다.
범려 동상
사당 회랑에는 범려를 칭송하는 글들을 오석(乌石)에 새겨서 전시해 놓았다.
범려사를 나와서 40여m 걸으면 완사강이다. 강건너 서쪽 서시전쪽으로 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중국 4대미인중 으뜸으로 꼽히는 서시(西施)의 성은 시(施)이고 이름은 이광(夷光)이다. 춘추말기 BC 505년 전후 제기(诸暨) 저라촌(苎萝村) 출신이다. 집안 대대로 저라산 아래 서쪽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서시라고 불렀다고 한다. 저라산은 높이 10m에 불과한 언덕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땔감을 팔았고 서시모녀는 이곳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모시풀(苎麻, 저마)로 만든 천을 표백하고 마을 앞 큰 강에서 빨래(浣,완)했다고 한다. 이 큰 강의 이름이 완사강(浣纱江, 후안샤쟝)이다.
당시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패배하여 오나라에서 3년간 인질로 잡혀 굴욕적인 생활을 보내다가 귀국한 후 와신상담(卧薪尝胆)하면서 부국강병에 전력투구를 하는 한편 오나라의 피폐를 도모하는 책략의 하나로 미인계를 쓰게된다. 이때 시골처녀 서시에게 일생일대의 전기를 가져다 준 인물이 범려였다. 범려가 미인계를 위해 미인을 찾으려고 전국을 다나던 중 이곳 완사에서 서시를 발굴하고 연인사이가 되었으며 동쪽마을 정단과 함께 싸오싱으로 데려가서 3년간 가무와 예법등을 교육시킨후 18세의 나이에 오나라 부차에게 바친 것이다. 서시는 15년동안 지내면서 빼어난 미모와 지혜로 부차를 사로잡아 총애를 받는 왕비가 되었고 부차의 실정(失政)을 유도한 면이 매우 컸다고 본다. 드디어 BC 473년 구천은 부차를 자살하게하고 오나라를 멸망시켜 패업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서시는 "월나라의 영웅, 오나라를 망친 요물"로 보고 있지만, 역사가들은 오의 복합적인 멸망 원인에 비추어 한가지 요인은 되지만 지나친 책임전가는 부당하다고 보고 있다.
완사강 보행다리
다리를 건너면 서시가 모시천을 빨았던 바위라고 하여 붉은 글씨로 "완사(浣纱)" 두 글자가 크게 쓰인 완사석(浣纱石)이 있다.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한다.
완사석
서시완사도(西施浣纱图)
완사석옆 계단을 올라가서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서시전(西施殿)으로 들어가는 서시고리(西施故里) 대문이 나온다.
이곳이 서시가 살았다는 저라산 서쪽마을이다. 서시고리 대문에는 서시고리(西施故里)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서시전(西施殿)이 있다. 서시전 편액 밑에 "절대가인(绝代佳人)" 의 편액이 걸려 있다.
서시고리 대문
서시전
서시전 건립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당대(唐代) 이후 소실 중수되다가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1986년에 디시 건립한 것이라 한다. 서시전 중앙에는 완사석위에 앉은 높이 2.8m 서시상이 있다. 후비(后妃) 복장을 하고 있다.
서시좌상
서시전 안에 "홍분천성(红粉天成, 하늘이 낸 여자)"와 "월중여와(越中女娲, 여와 같은 월나라 여신)"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홍분지(红粉池)는 작은 연못인데 서시가 선발되어 월의 수도인 회계(会稽, 현재 샤오싱(绍兴))로 떠나기 전날 밤 목욕한 곳이라 한다.
홍분지
서시전 왼쪽에 있는 고월대(古越台)는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건물안에는 중앙에 구천, 좌우에 문종과 범려의 상이 있고 위에는 와신상담(卧薪尝胆)이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다. 그 밑에 부모사민(父母斯民, 백성의 부모 노릇을 하다)이라 쓰인 편액이 붙어 있다.
고월대
고월대에서 오른쪽으로 가다가 뒤편 오른쪽에 비랑(碑廊)이 있다. 서시에 대한 고금의 시문과 다양한 사시모습이 오석(乌石)에 새겨져 벽에 걸려있다.
비랑
비랑을 지나면 저라정(苎萝亭)이 나온다. 3층으로 되어 있고 1층에는 유명한 이백(李白)의 시 "월계(越溪)의 아가씨 서시는 저라산 출신인데…… 부차의 나라를 한번 격파하고는 천년토록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네"라는《서시(西施)》를 새긴 비석이 있다.
저라정
이백의 《서시》
저라정 왼쪽으로 돌계단을 내려가면 서시장랑(西施长廊)이 나온다. 여기는 서시의 일생을 여러 그림과 설명문으로 진열해 놓았다.
서시장랑
이어서 서시의 이름인 이광(夷光)을 따서 만든 아광각(夷光阁)이 나온다.
이광각
제일 끝에는 큰 연못인 하화지(荷花池)가 있고 가운데 하얀색의 서시상이 있다. 하화는 "진흙탕 속에서 피어 나는 아름다운 꽃"이므로 바로 서시를 상징한다.
하화지의 서시상
출구를 나와서 다시 다리를 건너서 완사강변을 따라 올라오면 강에서 빨래하는 처녀들 조각상을 볼수 있다. 그 옛날 서시등이 빨래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빨래하는 처녀들 조각상
오나라가 멸망한후 서시의 최후에 대해서 몇가지 설이 있다. 즉, 오나라 멸망을 위한 자기사명을 완수했으나 오왕 부차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고소성(姑苏城)에서 자살 했다는 설, 월왕 구천의 왕비가 질투심과 나라에 누를 끼칠까봐 두려워 서시를 가죽포대에 담아 강바닥에 빠뜨려 죽였다는 설, 성난 오나라 백성들이 망국의 분풀이로 서시를 묶어 양자강에 빠뜨려 죽였다는 설등이 있으나 , 서시는 원래 범려와 연인사이였기 때문에 오나라가 망한후 범려와 함께 떠나서 제 2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주도적인 학설로 되어 있다.
제기시에서 샤오싱으로 돌아와 다음날 샤오싱 북역(绍兴北站)으로 가서 오전 09:36 출발하는 고속철을 타고 약 1시간 20분 걸려서 샹하이 홍챠오 기차역(虹桥火车站)에 도착했다.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홍챠오 공항 제2터미날 버스 정류장에서 공항버스로 약 1시간 10분 걸려 푸동 국제공항으로 가서 동방항공 MU5051에 올라 귀국길에 올랐다.
강남역사와 문화의 발자취 - 종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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