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강남역사와 문화의 발자취

23.서법성지(书法圣地) 난정(兰亭, 란팅)과 서성고리(书圣故里, 수성구리)

보헤미오 2018. 1. 2. 20:16

         난정(兰亭, 란팅)은 샤오싱(绍兴) 남서쪽 약 14km 떨어진 난저산(兰渚山, 란주산) 아래에 위치한 정원이다. 샤오싱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난정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 대로변에 크다란 표지석과  왕희지(?) 조각상이 반겨 준다.



표지석



조각상


         난정은 춘추말기 월왕(越王) 구천(勾践)이 이 일대에 난초를 심었다 하여 지명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동진(东晋) 때 왕희지(王羲之, 303-361)는 48세경 우군장군(右军将军), 회계내사(会稽内史)가 되어 5년간 이곳 샤오싱을 다스렸다고 한다. 당시 그가  이 곳에서 쓴 《난정집서(兰亭集书)》의 유명세 때문에 난정 또한 중국의 서법성지(书法圣地)가 된 것이다. 난정은 서성(书圣)으로 추앙 받는 왕희지와는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다. 1600여년 동안 난정은 수차례 재건하였다. 현재의 난정은 명(明)대인 1548년에 인근 천장사(天章寺)에서 이전해온 것으로 원래의 장소가 아닌 셈이다. 그후 청(清)대에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대나무 숲길을 조금 가면 난정 입구 대문이 나오는데 "난정고적(兰亭古迹, 난정의 옛자취)"이라고 쓰인 편액이 붙어 있다.





대문 편액



         오솔길을 따라가면 아지(鹅池)가 나운다. 왕희지는 평소 서법과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거위를 특별히 좋아하여 거위를 기르고 "아鹅)" 자를 즐겨 썼다고 한다.


아지


         아지를 지나면 "鹅池(아지)" 두글자를 새긴 비석이 있는데 왕희지가 "鹅" 자를, 아들 왕헌지(王獻之)가 "池" 자를 썼다고 한다.


  

아지비


      

        길을 따라가면 난정비정(兰亭碑亭)이 나타난다. 강희제(康熙帝가 쓴 "兰亭"을 새긴 비석인데 1695년에 건립된 것으로 문화혁명 때 파손된 것을 1980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난정비정


         난정비정 오른쪽에는 난정에서 가장 유명한 곡수유상처(曲水流觴处)가 나온다. "곡수유상"이란 "꼬불꼬불한 물길가에 앉아서 술잔을 흐르는 물에 띄워 순서대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라시대 포석정과 같은 것이다. 353년 음력 3월 3일 왕희지는 절강(浙江)의 명사 41명을 초청하여 봄맞이 행사를 가졌었고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각자 시를 읊었는데 지은 시를 엮어서 난정집을 만들었다. 이때 왕희지가 그 서문을 즉석에서 쓴 것이 바로  "천하제일행서"로 불리는 《난정집서》이다. 중국은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3일은 "중국난정서법절"로 정하여 국내외 인사들이 모여서 과거 "곡수유상"을 재현하는 풍류를 즐긴다고 한다.





곡수유상처


         곡수유상처 바로 앞에 유상정(流觴亭)이 있다. "곡수유상"의 풍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안에는  왕희지등 42명의 "곡수유상 "장면이 부채에 그려져있는 《난정수계도(兰亭修禊图)》와 명대 만든 판각화,《곡수유상도曲水流觴图)》가 걸려 있다.



유상정




난정수계도



곡수유상도


         유상정 오른쪽에는 왕희지의 사당인 왕우군사(王右军祠)가 있다. 안에는 묵지(墨池)와 묵화정(墨华亭)이 있다. 묵지는 왕희지가 글자 연습을 한후 붓과 벼루를 씻어서 물이 검게 변했다는 것인데 엄청난 연습 노력을 말해주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현장에서 많은 어린 학생들이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왕우군사






         유상정 뒷편에 팔각형의 어비정(御碑亭)이 서 있다. 1693년 봄 강희제가 이곳에 왔다가 쓴 《난정집서》전문을 새겨 놓은 비석이다. 뒷면에는 손자인 건륭제가 쓴 "난정즉사(兰亭即事)"가 함께 합각되어 있는 귀한 비석이다.


어비정



강희제 잔정집서 글씨


         어비정 옆에 "太(태)" 자가 쓰인 비석이 있고  주위에는 돌로 만든 18개 항아리와 각 항아리 앞의 대리석판은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가 글씨 연습한 것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왕헌지도 유명한 명필이다.  이곳은 관광객들의 글씨체험 학습장이기도 하다.




         어비정 뒤로 걸어가니 멋진 대나무 숲길이 나오고 난정비림(兰亭碑林)으로 갈 수 있다





비림


        비림을 나와서 조금 가면 긴 제방이 나오고  시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주위가 확 트인 풍광이다


지그재그형 돌다리


         돌다리를 건너서 제방길을 따라 입구쪽으로 가면 난정수법 박물관(兰亭书法博物馆)이 나온다. 안에는 중국서법관련 자료, 그림,영상물들로 대부분 왕희지 위주로 된 전시물 이다.


난정서법 박물관



입구 현관의" 之(지)" 자 조형물



난정집서를 쓰고 있는 왕희지




왕희지와 명사 친구 조각상



         《난정집서》는 왕희지 자신도 가장 아끼던 작품으로 사후에 보물로 전해지다가 7대손에 와서 분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태종(唐太宗)이 특히 《난정집서》를 좋아하여 사후 그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진본을 함께 묻었다는 설, 아들인 고종(高宗)이 그의 무덤 건릉(乾陵)에 묻었다는 설,

아예 처음부터 진본은 없었고 후대에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라는 설등이 있다.  박물관에는 여러종류의 《난정집서》 임모본(临摹本)의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이중에서 당(唐)대 풍승소(冯承素)의 임모본이 왕희지의 진적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당태종과 난정집서



풍승소 임모본



         서성고리(书圣故里, 수성구리)는샤오싱 중심가 동북쪽 즙산(蕺山, 지산) 아래에 있다. 숙소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어서 난정에서 숙소쪽으로 돌아와서 바로 갔다. 서성고리는 서성 왕희지가 샤오싱 재직시 살았던 옛 마을을 말한다. 현재 즙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계주강사(戒珠讲寺))는 왕희지의 고택이었으나  은퇴하면서 사원으로 바꾼 것이다. "왕희지고택(王羲之古宅)"으로 표기된 현재 건물은 1924년에 중건한 것을 다시 중수한 것이라고 한다.


서성고리 입구



왕희지 고택인 계주강사




계주강사 내부



대웅전










전시실



계주강사 앞 묵지(墨池)


계주강사 앞 묵지원(墨池苑)




계주강사 앞 골목길


          앞으로 가면 왼쪽에 아치형 제선교(题扇桥)가 나온다. 더운 여름날  왕희지는 팔리지 않는 부채들고 고생하는 노파를 도우려고 부채에 몇자 써주니 부채가 날개 돋히듯 팔리자 노파의 요구에 계속 응할 수 없어서 다리 근처의 골목길에 숨었다가 노파의 시선을 피해 갔다는 "희지서산(羲之书扇, 왕희지가 부채에 글씨를 쓰다)" 의 고사가 있는 다리이다.


진왕우군제선교





왕희지와 노파의 조각상



수로변의 가옥들


         제선교에서 앞으로 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왕희 진열관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습자도(習字图)가 있는데 어린 왕헌지가 글씨 쓰는 것을 왕희지부부와 여섯 형들이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다.






왕희지 진열관



습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