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沈园, 션위엔)은 노신고리(鲁迅故里)에서 동쪽으로 약 300m 에 위치한 남송(南宋)시대 심씨 부호의 원림(园林)이었다. 이곳은 남송의 애국시인 육유(陆游, 1125-1210)와 그의 첫부인인 당완(唐琬)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로 유명해진 곳이다. 심원은 원(元),명(明),청(清)대를 거치면서 황폐해졌던 곳을 1985년부터 대대적으로 복원되었다.
육유는 샤오싱 출신으로 남송초 29세 때 과거에서 장원을 하였으나 금(金)과 주화파 권력가인 진회(秦桧)의 방해로 취소되었다가 그가 죽은후 1158년 33세에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죽을 때까지 북벌계획을 굽히지 않았고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만여수의 시를 써서 애국시인으로 추앙 받고 있다.
심원을 알리는 육유와 당완의 조각상
북문 매표소
북문 매표소를 지나 들어가면 태호석으로 만들어진 시경석(诗境石)이 나온다. 시인 육유를 상징한다고 한다
시경석(诗境石)
문매람(问梅槛)
냉취정(冷翠亭)은 송(宋)대 큰 연못인 송지탕(宋池塘)을 향해 있고 관상어나 연꽃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이다
냉취정
심원은 크게 고적구(古迹区), 동원(东苑), 남원(南苑)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고적구가 중심지역이다. 송지탕 너머로 큰 건물인 고학헌(孤鹤轩)이 보이고 오른쪽 정자는 육조정정(六朝井亭)이다.
고학헌은 고학애명(孤鹤哀鸣, 외로운 학의 애절한 울음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육유는 주화파의 반대에 시달려온 자신을 외로운 학으로 비유했다. 원래 이 곳은 당정각(唐亭阁)이 있었던 옛터인데 심원을 정비할 때 그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고학헌
육조정정(六朝井亭)은 당(唐)대부터 육조(六朝)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심원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심씨 일가가 사용한 우물이라고 한다.
육조정정
고학헌의 남쪽 낮은 편에 채두봉시벽(钗头凤诗壁)이 있다. 이것은 육유와 당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전해준다. 심원이 유명한 것은 애국시인 육유와 당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 때문이다. 육우는 20세 때 외사촌 누이인 당완과 결혼했다. 두사람은 어릴적부터 함께 자라며 애정이 깊어져 결혼까지 하고 금슬이 유달리 좋았다고 한다. 육유의 부친이 죽고 과거급제도 늦어지는등 집안의 액운을 며느리 탓으로 비난하는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봉건시대인 당시로서 육유는 모친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결혼 2년만에 생이별을 한 것이다. 그후 육유와 당완은 각각 다른이와 재혼하였다. 헤어진지 5년후 육유는 홀로 심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남편과 함께 온 당완을 만났다. 남편의 승락하에 둘은 서로 술잔을 나누었다. 이루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은 육유는 즉석에서 담벼락에 애틋한 사(词) 한수를 썼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채두봉(钗头凤)》이다. 당완도 역시 참을 수 없는 감회에 젖어 답사(答词)를 썼다. 채두봉은 원래 귀부인 머리에 꼽는 화려한 비녀를 뜻한다고 한다. 현재 시벽에는 오른쪽에 육유의 사, 왼쪽에 당완의 사를 나란히 새겨 놓았다. 육유의 시 글씨는 그의 문집에서 집자(集字)하였다고 한다.《채두봉(钗头凤)》은 800여년 동안 수많은 문인묵객들을 매료시키는 천고의 절창이 되었고 심원은 천고의 명원이 되었다.
채두봉 시벽
육우의 사(词)
그대 불그레 고운 손, 따라주던 황금주 마시던 때
온세상 가득 버들가지 늘어진 봄날이었지
문득 동풍이 심술궂어 기쁜 정 흩어 졌네
가슴에 설운 맘 품고 헤어진지 몇해던가
잘못되었네, 잘못되었네 ……
봄빛은 예같은데 그대는 헬쓱해져
눈물 자욱 비단 수건 붉게 적시네
복사꽃잎 떨어지고 연못가 누각 고요해라
산을 두고 맺은 맹서 여전한데
편지 한 장 못 부치니
돌이킬 수 없어라, 돌이킬 수 없어라 ……
당완의 사(词)
세상 물정 야박하고 사람 맘은 모질어
황혼녁 빗속에 꽃잎은 쉬이 떨어지네
새벽바람 말라도 눈물 자욱 남았네
그대에게 전하고픈 마음
난간에 기대어 홀로 되뇌니
견딜 수 없어라, 견딜 수 없어라 ……
그대와 나 헤어지고 이제는 그때와 다른 신세
마음은 병들어 그네줄처럼 흔들리네
뿔고동 소리 밤 난간에 들려오니
누군가 찾아오려나 눈물 삼키고
기쁨으로 단장하네
속임수야, 속임수야 ……
이렇게 재회한후 당완은 병들어 4년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육유는 그후 당완과의 추억 때문에 여러번 심원을 방문하였고 심원을 회상하는 많은 시를 남겼다. 죽기전해인 84세에 당시를 회상하는 《춘유(春游)》라는 시도 남겨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하고 있다. 육유는 죽은 당완을 60년 이상 지나도록 잊지 못하고 애절하게 그리워했으니 당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채두봉시벽 동쪽에 송정정(宋井亭)이 서 있다. 송(宋)대 우물위에 선 정자이다. 우물은 난간은 없이 길쭉한 구멍만 나있다. 우물 구멍은 둘로 갈라져 있고 밑에는 하나로 통해 있다. 사람들은 우물 구멍을 둘로 가른 돌을 육유의 모친에 비유하기도 한다.
송정정
송정
송정정의 옆에 호로지(葫芦池)가 있다. 돌다리가 놓여져 있고 연못 모양이 조롱박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육유 당시에도 있었고 당완과 재회할 때 이 돌다리를 당완과 함께 거닐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호로지
초정(草亭)
동쪽으로 가면 동원(东苑)이 나온다. 동원은 정려원(情侣园)이라고도 하는데 육우와 당원의 애정을 기념하는 곳이다.
동원
동문을 들어서면 문정석(问情石)이 나온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인가? 사람으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같이 하도록 만드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문정석
금대(琴台)에서 본 정경
작교(鹊桥)
상인정(相印亭)
동원을 나와서 남원(南苑)으로 향했다. 남원은 오로지 육유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인데 먼저 무관당(务观堂)이 보인다. 무관당은 육유의 자(子)인 "务观"을 따서 붙인 것이다. 무관당 안에는 육유의 시, 서간, 비첩등이 선각(缐刻)되거나 탁본으로 전시되어 있다.
무관당
육유 방옹선생의 유상(遗像,죽은 사람의 초상)
회랑
무관당 맞은 편에는 육유 사적(史迹)의 진열관인 안풍당(安丰堂)이 있다. 안풍당 안에는 육우의 조각상이 있고 앞마당 좌우에는 2개의 조형물이 있다. 고촌야우(孤村夜雨)는 육우 만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철마빙하(铁马冰河)는 그의 불굴의 애국충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안풍당
육유 조각상
고촌야우(孤村夜雨) 조각상
철마빙하(铁马冰河) 조각상
심원 출구쪽으로 나오면 단운석(断雲石)을 볼 수있다.가운데가 갈라진 달걀 모양의 바위로 오른쪽에 "단(断)"자, 왼쪽에 "(雲)"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뜻은 다르지만 중국어 발음은 같아서 "단운(断雲, 끊어진 구름)"과 "단연(断绿, 인연이 끊어짐)은 서로 통하는 것이니 육유와 당완의 끊어진 인연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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