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강남역사와 문화의 발자취

17. 월(越)의 도읍지인 와신상담(臥薪尝胆)의 현장, 부산(府山, 푸산)

보헤미오 2017. 12. 27. 19:59

      샤오싱(绍兴) 시내의  부산(府山, 푸산)은 와룡산(臥龙山)인데 춘추시대 월(越)의 왕궁이 있었고 이후에도 여러 관공서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샤오싱(绍兴)이란 이름도 당초 회계(会稽)였다가 1129년 남송(南宋) 고종(高宗)이 금(金)의 공격을 피하여 이곳에 피난 왔을 때 월주(越州)에서 샤오싱(绍兴)으로 바뀐 것이다. 부산(府山)은  해발 74m의 낮은 산인데 현재는 부산공원(府山公园)이 되어 있다. 여기에는 월왕대(越王台), 월왕전(越王殿), 비익루(飞翼楼), 문종묘(文种墓)등 월(越)의유적과 당송(唐宋)의 문물들이 있다.

      춘추시대(春秋时代) 말기인  BC 496년 오왕(吴王) 합려(阖闾)가 월왕(越王)의  교체기에  전쟁을 일으켰다가   젊은 월왕(越王) 구천(勾践, BC 520-BC465)에게 대패하고 부상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 뒤를 이은 아들 부차(夫差, BC 528-BC473)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복수하기 위해 장작더미에 누워 자면서(臥薪) 절취부심하다가  마침내  BC494년 월(越)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대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践)은 병사 5천명을 이끌고 회계산(会稽山)으로 피신한후 포위되자   재상 범려(范蠡)의 건의로 "자신은 오왕의 신하가 되고, 처는 오왕의 첩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화친을 요청했으나 상국 오자서(伍子胥)의 반대로 실패했다. 다시 대부 문종(文种)의 계책으로 매수된 오(吴)의 태제 백비(伯嚭)가  부차(夫差)를 설득하였다. 구천(句践)부부와 범려(范蠡)는 오(吴)에 인질로 잡혀가서 말사육등 종살이를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3년후 부차(夫差)의 신임을 얻어 귀국할 수 있었다.  BC490년 월(越)에 귀국한 구천(勾践)은 비상한 각오로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범려(范蠡)의 건의대로 "십년생취십년교훈(十年生聚十年教训, 10년동안 인구와 물자를 늘리고 또 10년동안 백성을 가르치고 군사를 훈련시킴)" 이라는 20년 장기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메달아 놓은 짐승의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尝胆)의 고사이다. 후한(后汉) 때 지은 《오월춘추(吴越春秋)》에는 구천(勾践)이 와신(臥薪)도 하고 상담(尝胆)도 하였다고 한다.



월왕(越王)구천(勾践)의 와신상담도(卧薪尝胆图)




       월왕(越王) 구천(勾践)은 범려(范蠡)의 계획대로 미녀 서시(西施)를 부차(夫差)에게 바치는 미인계를 쓰는등 온갖 계책과 어려움을 극복하여 계획대로 BC475년  부차(夫差)를 자살시키고 오(吴)를 멸망시켜 마지막 춘추오패(春秋五霸)의 반열에 오르는 대반전을 이루어 냈다.



      부산공원(府山公园) 남문 매표소를 통과하면 맨 먼저 월왕대(越王台)가 나온다. 이 건물은 월(越)의 부국강병책에 따라  천하의 인재를 초빙하여 머물게하고 자문을 구한 곳이다. 원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송대(宋代)에 중수하였고 남송(南宋)초기 금(金)의 침공으로 고종(高宗)이 피난했을 때  행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건물은 1792년 청(清)의 건륭제(乾隆帝) 때 보수한 골격이라고 한다. 월왕대(越王台) 내부에는 특별한 전시물이 없어서 허전한 기분이었다. 현지 중국인 말에 의하면 이곳도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의 파괴로 피해가 컸으며 현재 보수 복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공원(府山公园) 남문 매표소앞



남문 매표소



월왕대(越王台) 정면



월왕대(越王台) 난간



           월왕대(越王台)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청백당(清白堂)이 나온다. 북송(北宋)의 걸출한 정치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태수로 근무할 때  집무실이라고 한다. 맞은편에는 그가 직접 팠다는 청백천(清白泉) 우물과 사각형 정자 청백정(清白亭)이 있다.  흰색 담벼락에는 그가 선정을 배풀었다는 청백당기(清白堂记)가 눈에 띤다.


   

     

청백당(清白堂)


청백당기(清白堂记)



청백천(清白泉)과 청백정(清白亭)


측백나무 화석(古柏化石)



        앞으로 가서 옆계단을 오르면 웅장한 월왕전(越王殿)이 나온다. 구천(勾践)이 집무하고 생활한 궁전이다. 월왕전(越王殿)안에 들어가면 전방 가운데 큰 두 기둥에  다음과 같이 주련(柱联)이 새겨져 있다.


卧薪尝胆志切沼吴(와신상담지절소오)

와신상담의 의지는 오나라를 늪으로 만드는 것이고


生聚教训功垂於越(생취교훈 공수어월)

십년생취와 십년교훈의 공적은 월나라에 드리워지네





월왕전(越王殿)


두 기둥의 주련(柱联)


         

         월왕전(越王殿)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벽에 대형 벽화가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 벽화는 와신상담도(卧薪尝胆图)이다. 원색의 강렬한 채색화 인데  구천(勾践)이 장작더미 위에 앉아 무릎 위에 칼을 얹고 복수를 다짐하는 비장한 각오를 읽을 수 있다. 그 주위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 십년생취십년교훈(十年生聚十年教训)" 을 써놓고 그 내용이 그려져 있다.


와신상담도(卧薪尝胆图)



           왼쪽에는 있는 벽화는 복국설치도(复国雪恥图)이다. 벽화 중앙에 구천(勾践)이 칼을 들고 출정을 외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 주위에 "서시예오(西施诣吴, 사시가 오나라에 가다)" 와 "소대가무(苏台歌舞, 고소대의 노래와 춤)"등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월왕전(越王殿)에는 충신이었던 범려(范蠡)와 문종(文种)이 모셔져 있고 구천(勾践)의 보검(宝剑) 복제본과 월(越)의 역사전시관이 있다.


          

복국설치도(复国雪恥图)



        부산(府山) 정상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부(大夫) 문종(文种, BC535- BC472)의 묘(墓가 있다. 범려(范蠡, BC536-BC448)와 문종(文种)은 친구이며 범려(范蠡)는 군사와 국방업무를, 문종(文种)은 국정을 맡아서 이십여년간 구천(勾践)을 도와 오(吴)를 멸망 시킨 공신중의 공신들이다.그러나 그후 이들의 삶의 행로는 달랐다. 범려(范蠡)는 오(吴)를 멸망시킨후 바로 구천(勾践)의 곁을 떠났다.일설에는 미인 서시(西施)를 대동하고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사기(史记)》기록에는  제(齐)로 가서 재상이 되었다가 부호인 도주공(陶朱公)이 되었다고 하며 오늘날 중국 4대재신의 반열에 올랐다.


범주려호도(泛舟蠡湖图,배를 띄워 떠나는 범려)



        한편 범려(茫蠡)는 구천(勾践)의 관상과 인품에 미루어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어도 부귀영화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문종(文种)에게  " 나는 새가 다 잡히면 활은 폐기되고(鸟飞尽, 良弓藏), 교활한 토끼가 다잡히면 사냥개는 삶겨 죽게 된다,(狡兔死走狗烹)" 고 말하며 빨리 월(越)을 떠날 것을 권유했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2년후인 BC 472년 문종(文种)은 모반의 죄를 뒤집어 쓰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토사구팽(免死狗烹)" 성어가 만들어진 유래이다. 문종묘(文种墓) 석정(石亭)안의 비석에 월대부 문종묘(越大夫文种墓) 라고 쓰여 있다. 묘(墓)의 규모가 예상 보다 작고 초라해 보였다.

  


문종묘(文种墓)


         문종묘(文种墓) 오른쪽 위로 조금 올라가면 마애석각(摩崖石刻)이 나온다.





당송명인 마애제각(唐宋名人摩崖题刻)



          부산(府山) 정상에는 비익루(飞翼楼)가 높게 서있다. 이 누각은 월왕(越王) 구천(勾践)이 3년간 굴욕을 참고 오(吴)에서 돌아온후  범려(范蠡)에게 시켜서 세운 4층 누각인데  주목적은 오(吴)의 동정을  관찰하기 위한 군사용이다. 구천(勾践)은 아마 자주 이 곳에 올라와 오(吴)쪽을 바라보며 복수를 다짐했을 것이다. 현재 비익루(飞翼楼)는 2500년전 당시 모습은 아니다. 그동안 여러차례 중수를 거쳤고 월망정(越望亭), 망해정(望海亭)등으로 불리다가 1988년 고증을 통하여 재건한후 비익루(飞翼楼)라고 부르고 있다. 비익루(飞翼楼)에 오르면 샤오싱(绍兴)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비익루(飞翼楼)



비익루(飞翼楼) 내 망월헌(望越轩)



비익루(飞翼楼)에서 본 샤오싱(绍兴) 전경


        조금 떨어진 곳에 봉래각(蓬莱阁)이 있다 오대십국(五代十国) 오월국(吴越国)이 세운 것으로 최근 중수한 것이다. 역사상 저명한 시인들이 부산(府山)에 오면 봉래각(蓬莱阁)에 들렸다고 한다. 아래로 내려가면 서문(西门)으로 나갈 수있다


봉래각(蓬莱阁)



부산공원 서문(府山公园西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