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왕묘(岳王庙, 약칭 岳庙, 위에먀오)는 서호(西湖, 시후) 서북쪽의 서하령(栖霞岭) 남산 기슭에 있는 남송(南宋)의 영웅 악비(岳飞, 1103-1142)의 사당으로 1221년 창건되었다. 악비는 명장중의 명장으로 여진족 금(金)나라의 침입에 항거하여 중원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1142년 정적인 진회(秦桧, 1090-1155)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살해되었다. 사후 63년인 남송 영종(宁宗) 때 (1204년) 그의 위업을 기려 악왕(岳王)으로 봉해졌고 충절의 현신으로 추앙 받았다. 악비는 중국 역사상 촉한(蜀汉)의 관우(关羽, ?-219)와 더불어 2대 무신(武神)으로 숭배받고 있다.
악왕묘 입구
악왕묘 광장 악비 소상
12세기 초엽 여진족이 세운 금(金, 1115-1234)이 거란족인 요(辽, 916-1125)를 멸망시킨후 1127년 송(宋)의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휘종(徽宗), 흠종(钦宗)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송은 사실상 멸망 상태였는데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变)이라고 하고 이때까지 송을 북송이라 부른다. 1127년 흠종의 동생 조구(趙構)가 강남의 난징(南京)에서 고종(高宗)으로 즉위했다가 금의 위협 때문에 바로 린안(临安, 현재 항저우)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남송시대를 열게 된다. 그는 절조가 없고 겁이 많아서 금나라와 대항하여 싸울 생각은 없고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어서 아군의 승리에 불안해하며 진회등 강화파를 중용한다. 강화파의 우두머리 진회는 한때 금의 포로가 된적이 있는 능굴능신(能屈能臣)의 달인으로 고종 아래서 20여년간 재상직을 지낸 자이다.
악비는 진회보다 13세 어렸고 1103년 하남성 상주(相州)출신으로 문무를 겸하는 최고의 인물로 성장한다. 열아홉살에 특공대로 전쟁에 참가하여 전공을 쌓으며 의용군을 바탕으로 무적군대 악가군(岳家军)을 조직했다. 악비군대는 어는 곳에 가든지 단 한건의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오로지 "중원 복귀, 송조 부흥" 이라는 투지에 불탔고, 악비는 126차례 전투에서 승리하여 명실 상부한 상승장군이었고 32세에 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 금과의 화친강화를 원하고 있던 고종과 강화파 우두머리인 진회는 대표적 주전론자인 악비의 승전 소식을 싫어했고 급기야 악비의 군대를 철수시켜 수복한 사직강산을 포기시키고 악비의 손에서 병권을 빼앗았다. 결국 진회등은 악비등에게 모반죄를 뒤집어 쒸어 악비의 아들 악운(岳云, 1119-1142)과 악비의 부장 장헌(张憲)을 처형하여 효수하고 금과 굴욕적인 화친을 맺은지 사흘후인 1141년 12.29 항저우 봉파정(凤波亭)에서 악비를 극비리에 독살하였다. 악비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명필이고 학자로서도 뛰어 났다.
충렬사
악비를 모시는 충렬사(忠烈祠)의 편액 에 쓰인 "心昭天日"(심소천일)은 중국 10원수(元帅)의 한사람인 엽검영( 叶剑英)의 글씨이다.
악비가 억울한 죽음에 임하여 " 마음은 하늘의 태양처럼 밝다"란 말로 그의 충성심을 나타냈다. 그후 역사는 악비의 결백함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악비 융장좌상 (높이 4.5m)
좌상위에 걸려있는 편액의"還我河山 (환아하산, 나의 산하를 돌려달라)" 글씨는 명필인 악비의 초서체이다.
충렬사 내부벽에는 악비의 일생을 벽화로 그려놓았는데 그중 대표적으로 3개를 골라 보았다.
악비의 모친이 악비등에 "盡忠报国(진충보국,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다.)"을 입묵하는 장면
악비와 금나라 군대의 전투장면
악비가 백성들로 부터 하례를 받는 장면
기념관
악비 기념관
대전인 악왕묘(岳王庙) 뒤에 있는 악비기념관(일명 啓忠祠)의 3개 전시실에는 조소, 회화, 병기 사료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내부 벽화중 악비와 그의 수하들
악비와 악가군(岳家军)
당시 전투에서 사용한 송나라 무기들
악비와 아들 악운의 묘(墓)
악비의 원통한 죽음은 그가 죽은후 22년만에 그 진상이 밝혀지고 억울한 죄명도 벗겨졌다. 그리고 악비의 유골도 발견되어 이곳에 안장되었다. 악비를 존경했던 외순(隗顺)이란 옥리가 악비가 죽음을 당하던 날 몰래 유해를 운반하여 채소밭에 묻어 보관 해두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중국 역사상 충신으로 이름을 남긴 악비는 민족에 대해서도 충성했고 어리석은 황제지만 충성을 다했다. 몸을 바쳐서 이민족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기백과 민족혼을 지녔기에 민족의 영웅으로서 중국백성들로부터 추앙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악비를 죽인 진회(秦桧), 장준(张俊), 만사설(万俟卨)과 진회의 처 왕씨(王氏)는 생전에는 벌을 면할 수 있었으나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철상(铁像)으로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 발가벗겨 무릎을 꿇림으로서 민족 반역자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그들은 지금 악비묘와 묘궐(墓阙)사이에서 양쪽 철창실안에 각각 팔이 뒤로 묶인채 추한 몰골로 무릎 꿇고 앉아 있다. 이것이 4인 주철궤상(铸铁跪像0이다.
악비묘 오른쪽에 있는 진회와 그의 부인 왕씨
악비묘 왼쪽에 있는 만사설과 장준
악비 능원(陵园)은 묘 앞쪽에 있다. 묘원 통로 양쪽에 128개의 비각(碑刻)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비랑(碑廊)이 있다. 북랑(北廊)에는 악비의 유묵 표장등이 있고 남랑(南廊)에는 악왕묘 중수기, 악비의 시작(诗作)순장품등이 진열되어 있다.
능원 가운데에는 분시회(分尸桧)란 향나무가 서있는데 그 연유는 악비묘에서 제사를 모실 때 향나무(桧树)를 양쪽에 심었는데 선량한 충신을 음해한 진회(秦桧)에 대한 통한을 나타내고자 "회(桧)"자를 이용하여 분시회(分尸桧, 진회를 토막내는 극형에 처한다)라고 한 것 같다. 하기야 중국인들은 진회를 욕할 때 여우짜휘(油炸桧, 기름에 튀겨 죽일 인간 말종, 진회)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랑
만강홍사비(满江红词碑)
만강홍사(满江红词)는 악비가 영웅적인 기개를 담아서 금(金)에 대한 항전을 고취하는 유명한 시다.
진충보국 대자벽
분시회 향나무
요즈음 중국정부의 악비에 대한 평가도 바뀌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민족의 영웅"에서 "충성스런 군인"으로 격을 낮추었다. 동북공정등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도 중국사의 일부라는 시각이 반영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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