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적벽고전장(三国 赤壁古战场,산궈 츠비구쟌창)
적벽(赤壁,츠비)시는 호북성(湖北省, 후베이셩),무한(武汉,우한)에서 남서쪽 약 100km 지점에 있고 적벽대전(赤壁大战,)이 벌어진 적벽진(赤壁镇,츠비젼)의 고전장(古战场,구쟌창)은 이곳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약 32km 떨어진 장강(长江,창장)가에 있다. 적벽(赤壁)시는 원래 이름이 포기(蒲圻,푸치)시 였으나 1998년 중국정부가 적벽대전(赤壁之战)과 도시를 연계하여 적벽(赤壁)이름을 붙였다.
삼국시기 아주 중요한 관광지이지만 벽지이기에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평소 꼭 보고 싶었던 곳이라 마음을 설레며 무한(武汉,우한))을 출발했다.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관광이다. 관광한 후 무한(武汉)으로 돌아와야 하고 관광시간도 약 3-4시간 소요되며 날씨도 흐리고 비가 오고 있었기에 고속철(动车)을 타고 출발 32분만에 적벽북역(赤壁北站,츠비베이쟌)에 도착. 택시를 타고 장대같은 빗속을 달렸다. 총알같이 달리기에 기사에게 "당신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천천히 가자"고 했으나 웃으며 대답만 하고 여전하다. 40여분만에 고전장(古战场,구쟌창)에 도착했다. 다행히 빗방울이 가늘어 졌다
(무한(武汉)에서 적벽고전장(赤壁古战场)가는 법)
버스(45元/人)는 무한 홍지버스터미널(宏基汽车客运站)에서 2-3시간 걸려 적벽시 버스터미널(赤壁客运中心) 하차. 시내버스(公交2路)로 성시정거장(城市停车站,청시 팅처쟌)으로 가서 소형버스(9元/人) 승차, 약 1시간 걸려 적벽진정거장(赤壁镇停车站,츠비전쟌)에 도착. 고전장(古战场)은 도보 약 10분 거리
일반기차는 무창기차역(武昌火车站,우창훠처쟌)에서 적벽역(赤壁站,츠비쟌)까지 약 2시간 소요.(19元/人)
고속철(动车,똥처)은 무한역(武汉站,우한쟌)에서 적벽북역(赤壁北站)까지 약 32분 소요(59.5元/人),
적벽(赤壁)시에 도착한 후에는 택시(편도 100元 정도), 또는 성시정거장(城市停车站)에 가서 소형버스 이용.
적벽북역(赤壁北站)
적벽대전(赤壁大战)은 중국 삼국시기 가장 유명한 전쟁이다. 208년 동한(东汉) 말년 손권(孙权,182-252)과 유비(刘备, 161-223)의
연합군이 장강(长江)의 적벽(赤壁),오림(乌林,우린)일대에서 조조(曹操,155-220)의 대군 20만명( 83만명설도 있음)을 대파한 전쟁이다.
중국역사상 약자가 강자를 이긴 유명한 전쟁중 하나이고 장강(长江)유역에서 벌어진 제1차 전쟁이기도 하다. 적벽대전은 일대 도박이었다.
손유연합군(孙刘联合军)의 승리로 조조의 천하통일 행보를 멈추게 하였고 위(魏), 촉(蜀),오(吴) 삼국정립(三国鼎立)의 기초가 되었다.
조조(曹操)는 기병, 보병, 수병 모두 백만이라 소문을 내고 손권(孙权)을 치겠다고 위협한다. 유비(刘备)는 당양(当阳)에서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장강(长江)으로 쫓기어 악주현(鄂州县)의 번구(樊口, 판코우)까지 쫒기는 신세가 되어 있어 유비집단의 생사존망이 손유동맹(孙刘同盟)
에 걸려 있었다. 손권(孙权)과 조조(曹操)가 손잡는 것을 염려한 제갈량(诸葛亮,181-234)은 손유동맹(孙刘同盟)을 성사 시키기 위해 동오(东吴)의 시상(柴桑,차이상, 현재 지우장(九江)서남)으로 간다. 《삼국지연의(三国志演义)》에서는 제갈량(诸葛亮)이 동오(东吴)의 주화파(主和派) 문신들과 벌인" 설전군유(舌战群儒)", 손권(孙权)을 설득하는 "교설손권(巧说孙权)", 주유(周瑜,175-210)를 격분 시키는 "지격주유(智激
周瑜)"등을 벌려 동맹을 성공시킨다. 사실은 제갈량(诸葛亮)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동맹이 결성된 것이 아니라 손권(孙权)은 이미 주유(周瑜),
노숙(鲁肃, 172-217)의 진언과 행동으로 마음을 결정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벽대전(赤壁大战) 각단계별 군의 진군로(进军路)
손유연합군(孙刘联合军)은 동오(东吴)의 전부대독(前部大督), 강력한 주전파(主战派)인 주유(周瑜)가 진두지휘한다. 연합군은 장강(长江)
을 따라 서진하다가 적벽(赤壁)에서 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간 황개(黄盖, 생몰미상)의 고육계(苦肉计), 방통(庞统, 179-213)의 연환계(连
环计)를 쓰는등 화공전략(火攻战略)을 완성한후 마지막은 제갈량(诸葛亮)이 부른 동남풍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후방을 교란시키고 황개(黄盖)의 자살함대가 선봉으로 화공전을 개시하자 조조(曹操)의 전선(战船)은 쇠고랑으로 묶여 도망 칠수 없었다.
본진의 화선공격과 강한 불길 바람으로 온천지가 불길에 휩싸여 아비규환이 되었다. 시뻘건 불길은 남쪽 강가 바위절벽을 붉게 물들였고
수많은 병사들의 피도 스며 들었다,이때부터 석두관(石头关)이었던 이름이 적벽(赤壁, 붉은 절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연합군은 계속 수륙으로 진격하여 도주하는 조조군(曹操军)을 남군(南郡,난쥔)까지 추격했다.
중국역사는 적벽대전(赤壁大战) 승리의 최고 주역은 주유(周瑜)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삼국적벽고전장(三国赤壁古战场)의 패방(牌坊). 고전장(古战场)은 우측으로 1km 들어간다
삼국적벽고전장(三囯赤壁古战场) 현판은 전 국가주석 장쩌민(江泽民)의 글씨
삼국적벽고전장(三国赤壁古战场) 안내도
약 300만평 규모다. 적벽산(赤壁山)을 끼고 있다. 적벽산(赤壁山)은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금란산(金兰山), 남병산(南屏山), 적벽산(赤壁山)이라고 불리는데 이를 합쳐서 적벽산(赤壁山)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시설 관람에 3-4시간 소요된다.(개방시간, 08:00-17:00, 무휴, 150元)
적벽초루(赤壁谯楼, 문루)
신무대(神武台, 군사훈련장)
관우(关羽)의 로봇 모습
나팔수 모습, 비상사태 발령?
종고루(锤鼓楼)
삼십육계병법(三十六计兵法)을 목판에 새겨놓은 계단길
설전당(舌战堂)
이곳은 제갈량(诸葛亮)이 많은사람과 논쟁을 벌리던 곳. 대담하고 훌륭한 논리로 동오(东吴)의 문신들과 손권(孙权)을 설득하여 손유동맹(孙刘
同盟)을 맺고 함께 조조와 싸웠다.(역사상 실제 장소는 아님)
금란산(金兰山)정상에 있는 천년고은행(千年古银杏,1,000년된 은행나무)
봉추암(庞雏庵)
금란산(金兰山) 중턱에 있는 검은 기와, 흰색벽 건물. 방통(庞统)이 기거하며 병법을 연구한곳. 방통은 경학과 계략에 뛰어났고 나중에 유비(刘备)의 중요 군사(军师)가 되어 서촉(西蜀)정벌을 성공시켰으나 현재 사천성(四川省,쓰촨셩)의 나강현(罗江县,뤄장셴)에 있는 낙봉파(落风坡,뤄펑포)에서 36세에 전사한 기재(奇才)이다.
봉추암(庞雏庵) 내부
천년고등(千年古藤)
방통(庞统)은 이 등나무 얽힌것을 보고 연환계(连环汁)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삼국조소원(三国雕塑园)
도원삼결의(桃园三决义)
주랑각벽(周郎刻壁,적벽에 칼로 두글자 새기다 )
소교출가(小乔出嫁,소교 시집가다)
죽간(竹简) 모양에 음각(阴刻)한 유명 시인묵객들의 적벽(赤壁)관련 시와 글
두목(杜牧)의 적벽(赤壁)
적벽(赤壁)
부러진 창 모래에 뭍혀
녹은 덜 슬었네
녹을 씻고 갈아보니
전대 것임을 알았네
동풍이 주유에게 불어주지 않았더라면
두여인 동작대에 같혀
적막한 봄 맞았으리
折戟沈沙铁未消
自将磨洗认前朝
东风不与周郎便
铜雀春深销二乔
*铜雀: 업성(鄴城)에 조조(曹操)가 세운 대(台)
*二乔:대교(大乔)는 손책(孙策)부인, 소교(小乔)는 주유(周瑜)부인
배풍대(拜风台)
배풍대(拜风台), 즉 무후궁(武侯宫)이다. 제갈량(诸葛亮)이 칠성단(七星坛)을 쌓고 동풍을 빌었던 곳이다.
원대(元代)의《삼국지평화(三国志平话)》에는 "제갈량(诸葛亮)이 누런옷을 입고 맨발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왼손에 검을 들고 어금니를 부딪치며 술법을 행하자 곧 큰 바람이 불었다"라고 묘사되어 있고, 원말명초(元末明初) 나관중(罗贯中)의 《삼국연의(三国演义》에서는 "제갈량(诸
葛亮)이 일찌기 기문둔갑천서(奇门遁甲天书)를 전수받아 바람과 비를 부르는 ‘ 호풍환우(呼风唤雨)’ 술법을 익혀 남병산(南屏山) 칠성단(七星坛)
에 올라 서북풍의 바람을 조조(曹操)의 함대에 화공을 펼칠 수 있는 동남풍으로 바꾸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큰 동남풍이 불어 황개(黄盖)의 돌격함대를 시작으로 하여 조조(曹操)의 대전선단과 군영을 엄청난 불바다로 만든 것은 사실이다.
아마 이 바람은 자연현상일 것이다, 제갈량(诸葛亮)이 풍부한 기상지식이나 자료로 그 시기를 예측하여 자신의 신묘함을 과시했다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적벽대전(赤壁大战)에서 흥미진진한 장면이기도 하다.
검제동풍(剑祭东风)하는 제갈량(诸葛亮)
주유(周瑜)의 석조상(石雕像)
적벽대전(赤壁大战) 옛터, 적벽산(赤壁山) 산등성이에 1981년 제작한 높이 6.8M, 화강석 기단까지는 8.58m 인 거대한 화강암 인물상이다. 갑옷, 투구로 무장한 주유(周瑜)의 모습은 영웅의 풍모가 넘치고 삼국최고의 미남이라는 주랑(周郎)의 모습 그대로이다. 34세의 나이로 손유연합군(孙刘联合军), 즉 촉오동맹군(蜀吴同盟军)을 지휘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战)을 승리한 주역답다.
익강정(翼江亭)
주유(周瑜)가 화소적벽(火烧赤壁, 화공으로 불태우는 적벽대전)의 연합작전을 지휘한 장소이다. 장강(长江) 전체를 한눈에 볼수있는 곳이다.
장강(长江) 건너 멀리 숲이 우거진 쪽이 조조(曹操)의 군대본영이 주둔했던 오림(乌林,우린)이다. 조조(曹操)는 대패한 후 화룡도(华容道,후아롱따오)를 거쳐 도주하여 돌아갔다.
적벽(赤壁) 아래로 내려가는 길
장강(长江)의 물이 불어나면 물에 잠겨 접근할 수 없는 절벽 아래, 다행히 물이 적을 때라 내려설수 있었다.
장강(长江)의 남안(南岸)에 있는 적벽 마애석각(赤壁磨漄石刻)
적벽고전장(赤壁古战场)의 하이라이트이다. 적벽대전(赤壁大战)의 옛터, 적벽산(赤壁山) 장강변(长江边) 높이 333m 절벽의 가운데 새겨진 "赤壁(적벽)"이라는 두글자(높이 150cm, 폭 104m), 전해오는 말로 주유(周瑜)가 승리 자축연에서 흥에 취해 검(剑)으로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서체(书体)가 삼국시기(三国时期)에는 쓰지않았고 당(唐)에 들어 쓰기 시작한 해서체(楷书体)인점에 비추어 당(唐)나라 때 쓴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한다. 위의 백색 초서체 "鸾(란, 전설속에 나오는 봉황과 비슷한 새)"은 팔선(八仙)의 하나인 당대(唐代) 여동빈(吕东宾)이 썼다고도 한다.
수병교장(水兵校场)
득성교(得胜桥)
겹겹이 방비장치가 잘되어 있는 오(吴)의 금성(金城)
적벽대전(赤壁大战) 후방 아지트인 토성(土城)
민속가(民俗街)
적벽고전장(赤壁古战场)을 둘러보고 출구쪽으로 나오면서 잠시 적벽대전를 직접 체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소동파(苏东坡,1036-1101)의 적벽회고(赤壁怀古)를 떠올려 보았다.
장강물은 동으로 물결따라 사라져갔네
아득한 옛날을 풍미하던 인물들과 함께
옛성 서쪽편 사람들은 말하지
삼국시대 주유의 적벽대전 터라고
험난한 바위절벽 하늘을 뚫는듯 하고
성난파도 강둑을 할키며
천겹의 물보라로 휘감아 올린다.
강산은 그림같은데
그시절 호걸은 몇몇이던가 !
아득히 당시의 주유를 떠올리니
소교가 처음 시집왔을 때
영웅의 풍채 당당하였네
하얀 깃털 부채에 윤건 쓴 제갈량과 담소하는 사이
강한 조조군대 재가되어 연기처럼 사라졌네
적벽을 거닐며 옛일을 회상 하노라니
정이 많은 내가 우습구나
일찍 이렇게 머리 세어진 모습
인생은 꿈과 같은 것
한잔 술들어 강물속에 비친 달에게 부어주노라
大江东去 浪淘尽 千古风流人物
故垒西边 人道是 三国周郎赤壁
乱石穿空 惊涛拍岸 捲起千堆雪
江山如画 一时多少豪杰!
遥想公瑾当年 小乔初嫁了 雄姿英发
羽扇纶巾谈笑间 强虏灰飞烟灭
故国神游 多情应笑我 早生华发
人生如梦 一尊还酹江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