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중국 현대문학을 창시한 노신고리(鲁迅故里, 루쉰구리)
노신고리(鲁迅故里, 루쉰구리)는 중국 근현대문학의 거장인 노신(鲁迅, 1881-1936)이 태어나서 성장한 집이고 현재는 그를 기리는 복합박물관이다. 옆에는 노신의 작품과 생애에 대한 기록 전시장인 노신기념관(鲁迅纪念馆)이 있다.
노신은 샤오싱(绍兴)의 부유한 관료 지주 집안의 도련님으로 자랐으나 13세 무렵에 가문이 몰락한후 사회적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1902년 21세 때 의학도가 되고자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했으나 중국인의 비참한 현실을 볼 때 의식개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도에 귀국하여 문학의 길로 갔다. 1918년 중국 최초의 백화문(白话文) 소설이자 중국 현대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첫 작품《광인일기(狂人日记)》를 썼다. 이 소설의 주제는 식인(食人)이고 광인의 입을 빌려 봉건 중국을 신랄하게 비판한 소설이다. 1921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아큐정전(阿Q正传)》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무지몽매한 주인공 아큐를 통해서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민족자존만 내세우는 중국의 슬픈 자화상을 그린 것이다. 노신은 단순한 문학가로만 끝내지 않고 혁명 문학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모택동(毛泽东)은 그를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将)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노신고리 입구 광장에는 거대한 화강암 석판에 노신의 흉상이 조각되어 있고 배경에는 노신의 성장기 때 마을 모습이 새겨져 있다. 노신고리는 샤오싱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려오는 곳이다. 일년내내 일반인, 초중학생들로 인산인해다.
노신고리 입구 광장
노신고리 안내도
입구 오른쪽에 노신조거(鲁迅祖居, 노신의 조상이 살던 곳)가 있다. 1754년 선조가 구입하여 주씨 일족이 합께 살았던 주가노대문(周家老台门)이다. 그후 집을 더 구입하여 분가한 곳이 노신중로 왼쪽에 있는 주가신대문(周家新台门) 즉, 노신고거(鲁迅故居)이다.
노신조거의 입구 편액 "한림(翰林)"은 노신 조부의 관직이름이다.
노신조거
노신조거 매표소
덕수당(德寿堂)은 주씨 가족이 방문객을 접대하거나 혼례, 장례, 제사등을 치르던 곳이다.
덕수당
조부모 영정이 있는 향화당(香火堂)
노신조거 맞은편에 삼미서옥(三味书屋)이 있다. 이 곳은 노신이 12-17세까지 5년간 공부한 곳인데 수경오(寿镜吾, 1849-1930)란 선비가 학생을 가르치던 사숙(私塾)으로 청말민국초 샤오싱에서 가장 유명한 서당이었다고 한다. 교실에는 노신이 사용하던 책상이 보존되어 있다.
삼미서옥 교실(노신의 좌석과 책상은 왼쪽 위)
삼여제(三余齐, 서제)
노신조거 바로 왼쪽이 노신기념관이다. "노신기념관(鲁迅纪念馆)" 현판은 곽말약(郭沫若)의 글씨다. 이 곳은 노신 일대기를 소개하는 기념박물관으로서 사진, 저서 초판본, 신문기사 스크랩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내부수리로 임시폐관 공고가 붙어 있어 관람할 수 없었다.
심원(沈园), 동호(东湖)등으로 통하는 오봉선 부두
노신기념관
노신기념관의 왼쪽이 노신고거(鲁迅故居)이다 . 노신이 태어나 18년간 살았던 집이다. 주변건물 모두가 노신신대문(鲁迅新台门)이었으나 조부의 투옥과 부친의 사망으로 가세가 몰락하여 1818년 이웃의 주씨에게 매각했고 주씨는 신대문을 크게 개축했는데 다행히 노신고거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노신고거 입구
노신부모와 노신과 첫부인
고수명목(古树名木)
침실
응접실
주방
노신와실(鲁迅卧室)은 노신이 1909년 일본에서 귀국후 거처하던 곳이다.
노신와실
주방을 지나서 좁은 회랑을 따라가면 백초원(百草园)이 나온다. 이 곳은 주씨 일가가 공동으로 사용하던 뒤뜰겸 채소밭이었다. 노신의 백초원에 관한 산문이 현재 중국 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한다.
백초원
어락원(鱼乐园)
노신필하 풍정원(鲁迅笔下风情园)에는 노신의 작품에 나오는 샤오싱의 여러 풍속을 재현해 놓은 진열관이 있다.
풍속 밀랍인형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고 있는 어린 노신 조각상
축복청(祝福厅) 내부
붐비는 관광객
함형주점(咸亨酒店, 센헝주뎬)은 거리 제일 안쪽에 있다. 이 곳은 노신의 단편소설 《공을기(孔乙己)》에 등장한 이래 노신고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장소다. 1894년 창업했다가 문을 닫은후 1991년 복원했다고 한다. 지금은 유명세로 관광객이 북적이는 명소가 되었다. 원래의 자리에 함형주점을 복원했고 그옆에는 초호화 5성급 호텔을 신축하여 운영하고 있다.
원래 자리의 함형주점
코믹한 모습의 공을기 동상
식당 내부
자율식당 처럼 되어 있고 결제는 현금 대신으로 식당카드를 사서 사용후 정산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 곳 분위기에 젖어 주문은 했지만 서비스나 가성비 대비 음식량과 맛은 미흡했다.
공을기가 즐겨 먹은 회향두(茴香豆)
죽순요리,동파육, 소흥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