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강남역사와 문화의 발자취

5.풍교야박(枫桥夜泊)의 한산사(寒山寺, 한산쓰)

보헤미오 2017. 11. 26. 14:14

     한산사(寒山寺, 한산쓰)는 소주성 서쪽 풍교진(枫桥镇)에 있는 선종명사(褝宗名寺)이다. 호구산 남문밖 버스정류장에서 시내관광 버스(游1路南线)를 타면 약 30분후 한산사 정거장에 도착한다.




한산사 매표소



한산사와 풍교 안내도



     한산사는 통상 남향인 절과는 달리 서향이다. 그이유는 몇가지설이 있으나 아마 경항대운하(京杭大运河)가 절의 서쪽을 감고 지나가고 있어서 배를 이용한 출입의 편의성이라고 본다. 한산사는 남북조 양(梁)나라 때인 천감년간(502-519)에 창건된후 5번이나 소실, 재건이 되풀이 되어 현존 건물은 청대 것이 대부분이다. 절이름은 처음에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었으나 당(唐) 정관년간(627-647) 고승이자 괴승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주승으로 있었기에 후세 사람들이 한산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산사 조벽(照壁)




법당앞




대웅보전



한산, 습득화상 소상(塑像)



 한산. 습득 석각화상(寒山拾得石刻画像)


     중국에는 "남선북마(南船北马)"라는 말이 있다. 즉 장강(长江)이남은 수로가 발달하여 옛날부터 배로 이동하고 이북은 평원지대라서  말을 이용하였다. 남쪽지방 여행시에는 주로 배를 타고 가다가 밤이되면 강가에 정박하고 배안에서 잤다고 한다.

     한산사는 당(唐)나라 시인 장계(张继)의 천고절창이 된 《풍교야박(枫桥夜泊》의 무대이다. 이 시는 장계가 742년경 과거에 낙방한후 실의와 좌절을 안고 귀향길에 한산사를 지나다가 작은 아치형 다리인 풍교(枫桥) 밑에 정박할 때  쓴 시다. 강변의 단풍풍경, 한산사 종소리에 자신의 심정을 녹여서  읊은 것으로 누구에게나 가슴을 저미게 하는 명시이다. 그는 그후 75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않다. 《 풍교야박》의 시 한수가  장계 자신은 물론 한산사를 명승지로 만든 중국 한시 역사상 초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많은 문인은 물론이고 청의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도 매료되어 한산사를 방문하곤 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枫桥夜泊(풍교야박)

풍교에 배를 매고


月落乌啼霜满天(월락오제상만천)

달지자 까마귀 울고 천지가득 서리가 내리네


江枫渔火对愁眠(강풍어화대초면)

강둑 단풍과 고깃배 불빛 마주한체 시름속에 졸고


姑苏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夜半钟声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한밤에 울려퍼지는 종소리 나그네 뱃전을 때리네



      한산사 주랑에는 역대여러 묵객들이  쓴 《풍교야박(枫桥夜泊)》의 시가 걸려있다. 청조말(清朝末) 유월(俞樾, 1821-1906)이 쓴 것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주랑(走廊)



     후당에는 주홍색벽의 종루(钟楼)가 있다. 시인 장계를 울린 당시의 종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일본이 탈취하여 갔다고도 한다. 현재의 종은

1906년 일본인들이 헌금하여 주조한 종이다. 일본인들의 한산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한다. 한산사 이야기와 장계의 시가 교과서에 실려있어 한때 일본관광객 러쉬현상이 중국인의 관심도를 높히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종루

     한산사 정문에서 나와 우측으로 돌아서 100미터 정도 가면 풍교를 만날 수 있으나,  우리는 강촌교(江村桥)를 거너서 길게 뻗어가는 고운하(古运河)를 따라가기로 했다.  장계가 배를 정박시킨 곳도 고운하 풍교 밑 이다



강촌교



고운하



장계  좌상




풍교 야뱍지



풍교


풍교와 연결되는 철령관(铁铃关)